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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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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1885년 영국이 미얀마를 침략하여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에는 프랑스와 미얀마의 외교적 접촉, 봄베이 버마 무역 회사의 사건 등이 있었으며, 영국은 최후 통첩을 통해 미얀마의 주권 침해를 시도했다. 전쟁은 영국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빠르게 전개되었고, 미얀마의 수도 만달레이가 함락되고 왕 티보 민이 폐위되었다. 1886년 미얀마는 영국에 합병되었지만, 격렬한 저항이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영국은 미얀마의 자원을 수탈하고 문화재를 약탈했으며, 미얀마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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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개요
분쟁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미얀마어 명칭(로마자 표기: Tatiya Ingaleik–Myanma Sit)
아바에서 1885년 11월 27일에 버마 군대가 명목상으로 항복하는 모습
아바에서 1885년 11월 27일에 버마 군대가 명목상으로 항복하는 모습
시기1885년 11월 7일 – 1885년 11월 29일
장소꼰바웅 왕조
결과영국의 승리
꼰바웅 왕조 멸망
꼰바웅 왕조가 영국령 인도에 합병됨
시보 민과 그의 가족 폐위 및 체포
버마 저항 운동 (1885–95)의 지속
관련 분쟁영국-미얀마 전쟁
교전 세력
교전국 1대영 제국
영국령 인도
교전국 2꼰바웅 왕조
지휘관 및 지도자
영국령 인도해리 프렌더개스트
꼰바웅 왕조시보 민(전쟁 포로)

2. 배경

19세기 후반, 영국프랑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 경쟁을 벌였다. 미얀마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관심 대상이었다. 아미타브 고시의 소설유리 궁전》은 초반부에서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묘사하고, 전쟁에서 패한 군주 시보가 영국령 인도로 쫓겨나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왕비 수파얄라트(Supayalat)와 티보 왕(Thibaw Min) 옆에 있는 측실 수파얄레이(Supayalay)(1885년 11월)


1885년, 프랑스 영사 M. 하스(M. Hass)가 만달레이로 이동했다. 그는 버마에 프랑스 은행 설립, 만달레이에서 영국령 버마 북부 국경까지의 철도 건설, 그리고 버마 정부가 통제하는 독점 사업 운영에 프랑스가 참여하는 것을 협상했다. 영국은 외교적 압력으로 대응하여 프랑스 정부가 하스를 소환하도록 설득했고,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해임되었다. 프랑스가 버마에서 물러섰지만, 프랑스의 행동과 다른 많은 사건들은 영국으로 하여금 버마에 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1]

2. 1. 영국-미얀마 관계 악화

1878년 미얀마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한 후, 영국 주재관이 철수하면서 양국 간의 공식 외교 관계가 종료되었다.[1] 1880년대에 영국은 미얀마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에 우려를 표명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프랑스가 미얀마 국경에 도달했던 것이다. 1883년 5월, 미얀마 고위급 사절단이 유럽을 방문했는데, 공식적으로는 산업 지식 습득을 위한 것이었지만, 곧 파리로 가서 프랑스 외무장관 쥘 페리(Jules Ferry)와 협상을 시작했다. 페리는 결국 영국 대사에게 미얀마가 군사 장비 구매와 함께 정치적 동맹을 협상하려 했다고 인정했다. 영국은 미얀마의 행동에 문제를 삼았고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1]

1881년, 인도와 미얀마의 국경에서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인도의 영국 당국은 국경을 일방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위원회를 임명했다. 위원회는 작업 과정에서 영국 측에 있다고 판단한 마을의 미얀마 당국에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얀마는 지속적으로 반대했지만, 결국 물러섰다.[1]

2. 2. 봄베이 버마 무역 회사 사건

1885년, 영국계 회사인 봄베이 버마 무역 회사(Bombay Burmah Trading Corporation)가 동구(Toungoo)에서 채취한 티크의 양을 축소 보고하고 직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버마 법원으로부터 벌금을 부과받았다.[1] 버마 법원은 회사에 벌금을 부과했고, 버마 관리들은 일부 목재를 압수했다. 회사와 영국 정부는 혐의가 허위이며 버마 법원이 부패했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버마 정부가 분쟁 해결을 위해 영국이 임명한 중재자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1]

버마가 이를 거부하자 영국은 1885년 10월 22일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최후통첩은 버마가 만달레이에 새로운 영국 주재관을 받아들이고, 주재관이 도착할 때까지 회사에 대한 모든 법적 조치나 벌금을 중단하며, 버마가 영국의 외교 관계 통제에 복종하고, 버마가 영국에 버마 북부와 중국 간 무역 발전을 위한 상업 시설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1]

이 최후통첩을 수락하는 것은 버마의 실질적인 독립을 끝내고, 영국령 인도의 준독립적인 토후국과 유사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11월 9일, 양곤(Rangoon)에서 조건 거부가 사실상 접수되면서 만달레이 점령과 버마 왕 티보 민(Thibaw Min)의 폐위가 결정되었다.[1]

3. 전쟁의 전개

1885년 10월, 영국은 미얀마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미얀마가 이를 거부하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미타브 고시의 소설유리 궁전》은 초반부에서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묘사하고, 전쟁에서 패한 티보 왕이 영국령 인도로 쫓겨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국군은 이라와디 강을 통해 빠르게 진격했고, 미얀마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미얀마 국방장관 킨운 민기 우 캉은 평화 협상을 위해 영국군 공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모든 부대가 따르지는 않았다. 영국군은 냐웅얀 왕자를 옹립할 것이라는 선전을 퍼뜨렸지만, 이는 거짓이었다.

3. 1. 영국의 군사 작전

영국군은 이라와디 강을 따라 수도 만달레이로 진격하는 방식을 택했다. 당시 미얀마는 울창한 정글 지대여서 군사 작전에 불리했고, 영국은 상부 미얀마 내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의 증기선은 수년 동안 이라와디 강의 주요 수로인 양곤에서 만달레이까지 운항해 왔다. 따라서 영국군은 수로를 따라 직접 수도로 진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1] 또한 이라와디 선박회사 소유의 많은 소형 강 증기선과 바지선(또는 평저선)이 프레더릭 찰스 케네디[2]의 지휘 아래 양곤에 있었고, 회사 관리들의 강 항해 지식을 영국군이 활용할 수 있었다.[1]

해리 프렌더가스트 장군이 침공 작전 지휘를 맡았다.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도 동원되었으며, 수병과 함포의 지원이 중요했다. 총 병력은 영국군 3,029명, 인도 세포이 6,005명, 함포 67문, 강에서 사용할 기관총 24문이었다.[3]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한 강 함대는 55척 이상의 증기선, 바지선 등으로 구성되었다.[1]

타예트묘는 국경과 가장 가까운 강 상의 영국 기지였으며, 11월 14일 원정대 대부분이 이곳에 집결했다. 같은 날 프렌더가스트 장군은 작전 개시 지시를 받았다. 미얀마 왕과 그의 나라는 진격 속도에 놀랐고, 저항을 조직할 시간이 없었다. 심지어 증기선 등을 강에 가라앉혀 강을 막을 시간조차 없었다. 진격 명령을 받은 바로 그날 무장 증기선인 이라와디호와 캐슬린호가 미얀마 포대와 교전하여 미얀마 왕의 증기선과 바지선들을 빼앗았다. 16일에는 양안의 포대가 육상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미얀마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11월 17일, 민흘라에서 미얀마군은 상당한 병력으로 요새를 지켰으나, 영국 인도 보병 여단의 공격으로 170명이 사망하고 276명이 포로로 잡혔다. 다음날과 그 후에도 진격이 계속되었고, 해군 여단과 중포병이 선두에 서서 냐웅우, 파콕쿠, 민얀의 미얀마 강 방어 시설을 차례로 무력화시켰다.[1]

일부 자료에 따르면, 티보의 국방장관 킨운 민기 우 캉이 영국과 평화 협상을 원하여 미얀마군에게 영국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미얀마의 저항이 치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명령은 일부 미얀마 여단에서 따랐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게다가 영국은 미얀마를 통과하면서 티보 왕을 폐위하고 냐웅얀 왕자(티보의 이복형)를 새 왕으로 옹립할 것이라고 선전했다.[4] 당시 대부분의 미얀마 사람들은 티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선전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실제로 새 왕을 세우지 않고 미얀마를 병합하자, 격렬한 반란이 10년 이상 계속되었다.

11월 26일, 함대가 수도 아바에 접근했을 때, 티보 왕의 사절들이 항복 제안을 가지고 프렌더가스트 장군을 만났다. 27일, 왕은 군대에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많은 미얀마군은 무기를 가지고 해산했고, 게릴라 부대로 전쟁을 계속했다. 11월 28일, 전쟁 선포 후 2주 만에 만달레이가 함락되었고, 티보 왕은 포로로 잡혔다. 강가의 모든 요새와 도시, 왕의 대포(1861문), 수천 개의 소총, 머스킷총, 무기가 압수되었다.[1]

프렌더가스트 장군은 만달레이에서 12월 28일 바모에 도착했다. 왕은 폐위되어 왕족과 함께 인도로 유배되었고, 수도와 강 전체가 영국의 손에 들어왔지만, 반란군들은 격렬한 저항을 계속했다.[1]

3. 2. 미얀마의 항복

1885년 11월 26일, 함대가 수도 아바에 접근했을 때, 티보 왕의 사절들이 프렌더가스트 장군에게 항복을 제안했다. 11월 27일, 왕은 군대에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천 명의 미얀마인이 무기를 내려놓았지만, 많은 수는 무기를 가진 채 해산하여 게릴라 부대로 전쟁을 계속했다. 11월 28일, 전쟁 선포 2주 만에 만달레이가 함락되었고, 티보 왕은 포로로 잡혔다. 강가의 모든 요새와 도시, 왕의 대포(1861문), 수천 정의 소총과 머스킷총, 그리고 무기들이 압수되었다.[1] 압수품은 90만인도 루피 (약 6만 파운드)의 이익을 남기고 매각되었다.

마드라스 연대 뱅갈로르 전쟁 기념관은 1885-87년 미얀마에서 연대가 희생된 사람들의 삶을 상세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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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 초네의 전통 회화는 티보 왕이 만달레이를 떠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프렌더가스트 장군은 12월 28일 바모에 도착했다. 티보 왕은 폐위되어 왕족과 함께 인도로 유배되었고, 수도와 강 전체가 영국의 손에 들어왔다.[1]

4. 미얀마 합병과 저항

1886년 1월 1일, 인도 총독 듀퍼린 경은 미얀마를 영국에 합병한다고 선포했다.[5] 이 선포문은 다음과 같다.

> 여왕 폐하의 명령에 따라, 이전 티보 왕(King Theebaw)이 통치했던 영토는 더 이상 그의 통치를 받지 않고 폐하의 영토가 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폐하의 뜻에 따라, 총독이 임명하는 관리들이 통치할 것입니다.
1886년 1월 1일.
듀퍼린,
총독

이 합병은 1896년까지 지속된 미얀마인들의 반식민지 저항을 촉발했다.[4] 영국은 프레더릭 경의 지휘 아래 미얀마 전역에 소규모 군사 경찰 보호 초소를 설치하고, 저항 세력이 모일 때마다 소규모 진압 부대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억압했다.[1] 영국은 미얀마에 증원군을 투입하여 수년 동안 어렵고 잔혹한 탄압을 이어갔으며, 미얀마의 저항 세력은 10년 이상 활동을 지속했다.[4]

영국은 버마 왕국이 명목상으로만 지배했던 카친힐스와 친힐스의 부족 지역, 그리고 청나라가 영유권을 주장하던 미얀마 북부 지역도 점령했다.[4]

1885년 11월에는 미얀마 동부 국경 초소인 동구(Toungoo)에서 제3 마드라스 경보병(Madras Light Infantry)의 W. P. 디컨 대령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닝얀(핀마나(Pyinmana))을 목표로 육상 진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진압하고 야메틴(Yamethin)과 흘라잉뎃(Hlaingdet)으로 진격했다. 영국군은 기마병 없이는 버마군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인도에서 기병 연대를 파견하고 현지에서 기마 보병을 모집했다.[1]

4. 1. 영국의 식민 통치

1886년 1월 1일, 인도 총독 듀퍼린 경의 선포에 따라 미얀마는 영국에 합병되었다.[5] 이는 1896년까지 지속된 미얀마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4] 영국군은 미얀마 전역에 소규모 군사 초소를 설치하고, 저항 세력이 모일 때마다 진압 부대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억압했다.[1]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저항 세력은 10년 이상 활동을 지속했다.[4]

영국은 카친힐스와 친힐스 등 부족 지역으로도 통제를 확대했다. 이 지역들은 이전 버마 왕국에서도 명목상으로만 지배했던 곳으로,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또한, 청나라가 영유권을 주장하던 미얀마 북부의 분쟁 지역도 영국이 점령했다.[4]

영국은 미얀마를 병합한 후, 미얀마 정부의 귀중품을 약탈했다. 금, 보석, 비단, 장식품 등은 영국으로 반출되어 영국 왕실과 유력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거나,[4] 경매에 부쳐졌다.[6] "만달레이 상품위원회"가 설립되어 구 버마 정부 소유 재산을 처리했으며,[6] 경매 물품은 대부분 군인, 해군 장교, 공무원, 일부 유럽 여행자들에게 팔렸다.

손상되었거나 예술적 가치가 낮다고 판단된 귀금속 제품은 금괴로 녹여졌다. 가치가 매우 높다고 판단된 물품들은 콜카타의 토목기술자에게 보내졌다.[7] 11개의 금 부처상을 포함한 일부 종교적으로 중요한 물품들은 콜카타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요청이 있을 경우 버마 왕족 후손들에게 반환될 예정이었다. 기계, 증기선 등 실용적 가치가 있는 물품들은 영국 정부로 이전되거나 헐값에 매입되었다.[7] 주철포, 대포, 야포 등 무기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심해에 버려졌다.

1886년, 영국은 수익성이 높은 모고크의 루비 광산을 확보하고 영국 상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8]

4. 2. 미얀마인의 저항

1886년 1월 4일 만달레이에서 영어와 버마어로 발표된 "영국령으로의 미얀마 합병 선포문"


1886년 1월 1일, 인도 총독 듀퍼린 경의 선포에 따라 미얀마는 영국에 합병되었다.[5] 이 합병은 1896년까지 지속되는 반식민지 저항을 촉발했다.[4]

영국은 프레더릭 경의 지휘 아래 미얀마를 정복했다. 이 과정은 전국에 소규모 군사 경찰 보호 초소를 설치하고, 자유 투사들이 모일 때마다 경장의 소규모 부대를 출동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은 미얀마에 증원군을 투입했고, 수년 동안 지속된 이 전투 단계에서 가장 어렵고 잔혹한 탄압은 영국과 인도군에게 맡겨졌다.[1] 로버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자유 투사들은 10년 이상 활동을 지속했다.[4]

영국은 카친힐스와 친힐스의 부족 지역으로 통제를 확대했다. 이 지역들은 버마 왕국에 의해서도 명목상으로만 지배되었는데,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또한 청나라 정부가 주장한 미얀마 북부의 분쟁 지역도 점령되었다.[4]

1885년 11월, 미얀마 동부 국경 초소인 동구(Toungoo)에서 제3 마드라스 경보병(Madras Light Infantry)의 W. P. 디컨 대령의 지휘 아래 닝얀(핀마나(Pyinmana))을 목표로 육상 진군이 시작되었다. 자유 투사들의 산발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압은 성공적이었고, 이후 부대는 야메틴(Yamethin)과 흘라잉뎃(Hlaingdet)으로 진격했다. 영국군은 기마병 없이는 버마군과 성공적으로 싸우는 것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

5. 문화적 영향

아미타브 고시의 소설유리 궁전》은 초반부에서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묘사하고, 전쟁에서 패한 시보 왕이 영국령 인도로 쫓겨나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6. 더불어 보기


  • 영국-미얀마 관계

참조

[1] 백과사전 Burmese Wars s.v. Third Burmese War, 1885-86
[2] 웹사이트 Lot 21, Orders, Decorations, Medals and Militaria. To coin... (19 September 2003) | Dix Noonan Webb https://www.dnw.co.u[...] 2018-06-10
[3] 서적 The Victorians at war, 1815-1914: an encyclopedia of British military history
[4] 서적 The Making of Modern Burma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BRITISH RULE OF BURMA Facts and Details http://factsanddetai[...] 2019-06-17
[6] 서적 The Prizes of War Historical Research Department, Washington University
[7] 서적 The Prizes of War Historical Research Department, Washington University
[8] 서적 Victorian Jewellery Studio E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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